Admin/News마커_일반 2009. 8. 19. 15:13

인동초 - 김대중 대통령님 서거

‘인동초(忍冬草)’.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생애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엷은 잎 몇 개로 모진 겨울을 견뎌내고 새 봄에 꽃을 피운다는 인동초. 그건 DJ의 별명이기도 하다. 이 별명대로 그의 일생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였다. 숱한 시련에 부닥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인간승리의 신화를 일궜다.

김대중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목포에서 뱃길로 34㎞ 떨어진 작은 섬이다. 그의 아호인 후광(後廣)은 고향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일본인 지주 밑에서 소작농을 하던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사이에서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에 기록된 생년월일은 1926년 1월 6일(음력 1925년 12월 3일)이지만 실제 태어난 해는 그보다 2년 앞선 1924년이란 게 동교동 측 설명이다. 하의국민학교 4학년 되던 해 그는 목포 북교국민학교로 전학했다. 39년 그는 당시 전국 상업학교 중 수위를 달리던 명문 목포상업학교(목포상고의 전신, 현 전남제일고교, 지금의 중+고교 과정에 해당)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취업반으로 들어갔으나 2학년을 마치고 진학반으로 옮겼다. 소년 김대중은 역사와 정치,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독서광이기도 했다. 일본어로 된 ‘자본론’을 읽을 정도였다.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목포상업학교 후배이자 훗날 그의 비서를 지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회고.

“재학생들끼리 싸움이 붙어 교내가 아수라장이 됐을 때 DJ가 졸업생 자격으로 학교에 왔다. DJ는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돼 나라의 재건을 위해 힘써야 할 젊은이들이 서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무기를 버리고 서로의 손을 잡으라’고 학생들을 설득했다. 그토록 말을 잘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때 ‘사나이로 태어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인생을 바치자’고 결심했고 결국 DJ와 평생을 같이하게 된 계기가 됐다.”

김대중은 목포상고를 졸업, 만주 건국대에 응시했지만 서류전형에서 낙방해 패배를 맛본다. 그는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재수를 포기,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인 목포상선회사의 경리사원으로 입사한다. 하지만 대학 진학 포기 결정은 이후 그를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하는 단초가 된다.

해방이 되자 그는 일본인 사장이 물러난 목포상선회사의 재산관리인이 됐다. 그해 11월엔 대표의 자리에 오른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셈에 강했던 그는 사업에도 수완을 보여 전남선박 목포조합장·대양조선 사장 등을 지냈다. 48년엔 목포일보를 인수해 주필을 맡기도 했다. 승승장구하던 김대중은 46년 목포상고 동기생의 소개로 첫 부인 차용애 여사와 결혼한다.

54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다. 정권 연장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 게릴라를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대혼란이 빚어진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평생 열세 번의 선거에 출마해 일곱 번 당선했다. 국회의원(민의원 포함) 선거에 아홉 번 나와서 여섯 번(5, 6, 7, 8, 13, 14대) 당선했다. 대통령 선거엔 네 번 출마한 끝에 당선됐다. 순탄치 않은 역정이었다. 다섯 차례의 대선에 출마해 모두 당선한 박정희나, 열두 차례의 선거에 출마해 열 번 당선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대조적이다.

첫 출마는 54년 3대 총선. 고향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이어 강원도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5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4대 총선 때는 자유당 정권의 방해로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두 아들(홍일·홍업)을 낳은 부인 차씨와 사별하는 불운까지 겹쳤다.

이후 61년 5월의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사흘 만에 5·16 쿠데타가 벌어지는 바람에 의사당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불운의 연속인 셈이다.

김대중이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접어든 것은 63년. 6대 총선에 목포에서 당선되면서부터다. 그 전해인 62년엔 당시 YWCA 총무이던 ‘신여성’ 이희호 여사와 재혼, 평생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를 찾았다. 3남 홍걸도 낳았다. 불운을 극복한 그의 앞에는 탄탄대로가 열리는 듯했다. 타고난 지략과 달변으로 그는 야당의 명대변인 소리를 들었다. 개원 초기 6개월 동안 본회의에서 13차례나 발언했다.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처리를 막기 위해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 동안 쉬지 않고 발언하는 필리버스터(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로 전국적 지명도도 얻었다. 이때 기록한 5시간19분은 최장시간 국회 연설 기록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정치에 들어온 후 그는 ‘인동초’의 길을 걸었다. 도전과 응전, 역경과 환희가 교차됐다. 특히 평생의 라이벌인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만남으로써 정치 인생 내내 숙명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

7대 신민당 대선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에서 그는 막판 대역전 드라마 끝에 낙승을 자신하던 YS를 제치고 후보로 지명된다. 71년 7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분패했지만 표차는 94만 표에 불과했다. 현직 대통령이란 프리미엄을 누린 박정희에겐 충격이었다. 그것은 김대중에겐 혹독한 시련의 전주곡이었다.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정치 탄압은 박정희 정권과 10·26 이후 신군부로 이어졌다. 71~87년은 김대중의 정치인생 중 최대의 암흑기이자 형극의 세월이었다. 이 시기 김대중은 모두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간 투옥됐으며 10년간 55회의 가택연금을 당했다. 상당 기간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1980년 신군부 세력이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재야 인사 20여 명에 대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 김 전 대통령은 이듬해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김대중 구명운동이 벌어지자 군사정권은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며 1982년 12월엔 그를 석방했다. 95년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이 제정돼 관련자들의 재심 청구와 명예 회복이 이어졌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재심을 청구해 2004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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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h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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