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의 법치’ 맞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 경악스러운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떴다.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을 전리품인 양 한 손으로 자랑스럽게 치켜들고 있는 전투복 차림의 남성과 그의 뒤에 나비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노신사가 앉아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이 비슷한 사진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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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때 무참하게 참수되어 여전히 피가 낭자한 중국인의 머리채를 들고 자랑스럽게 포즈를 취한 일본군의 사진이었다. 이와 함께 당시로서는 드문 양복 차림으로 이러한 학살을 유유히 지켜보는 일제와 만주국 고위 관리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떠올렸다. 한편으로는 잔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화와 멋의 상징인 나비넥타이로 위장된 야만의 역겨운 모습을 담은 기록들이다.
내가 받은 이런 불쾌한 인상이 국내 현실과는 많은 거리가 있기를 바라지만, 최근 만난 국내의 지인들도 그것이 바로 한국의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는 정권 교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촛불시위로 인해 이미 양분된 사회 여론의 골을 더욱 깊게 팠다는 것이다.
‘법치’는 만병통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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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정권 재탈환에 성공한 보수 집권 세력은 이러한 갈등의 진원지에 친북 좌익 세력이 잠복·준동하고 있다고 보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강력한 ‘공안통치’를 펴겠다고 천명하고 이를 ‘법치’의 핵심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비판 세력은 갈등의 핵심은 바로 집권 세력의 독선적 권위주의와 아집이 국민과의 민주적 소통을 차단한 데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현 정권은 대선에서도 또 총선에서도 압승했기에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또 ‘법치’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위임도 받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형식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나치가 집권 이후 많은 법들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이에 근거해 전대미문의 ‘불법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쓰라린 경험을 거울 삼아 패전 후 서독의 헌법학자 구스타프 라드부르흐는 모든 것을 법에 의거하려는 법실증주의의 모순을 지적하고 자연법과 인권에 기초한 실질적인 법치국가를 주창했다. ‘법적인 불법’이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수시로 발생하는 공권력에 의한 의사표현과 평화적인 집회의 제한과 탄압은 바로 법을 앞세워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분명한 불법적인 사태다. 그럼에도 국민권익위원회의 위원장조차 이런 불법을 정당화하는 ‘법치’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시장이 곧 민주주의인가
국회에서는 지금 ‘미디어법’을 둘러싼 갈등도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들린다. 대자본 중심의 미디어 시장 개편이 언론의 공공성을 철저하게 훼손하고 나아가 언론 자유를 본질적으로 왜곡시킨다는 데 두말할 필요가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나는 곧 내 자신의 5년 전 경험을 떠올리며 그의 자살은 곧 언론에 의한 타살이라고 생각했다. 법치의 중심에 스스로가 서 있다고 과대망상하는 검찰과, 민주주의를 위해 언론 자유를 수호한다고 역시 과대망상하는 언론 재벌 또는 재벌 언론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벌인 여론 재판이 그의 삶을 비극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언론도, 학교 경영도, 국민 건강도 모두 시장의 자율에 맡기면 된다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은 또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내세우며 노동 세계의 내적 분화를 계속 유도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체제를 유지하려 든다.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세계적인 범위에서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 물론 쉽지는 않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의 제도적 보호를 도외시한 사회적 통합은 애초부터 어려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서거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읽고, 이 책의 일독을 주위 사람에게도 권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왜 그는 ‘미국적인 꿈’을 아름답게 서술한 많은 책 대신에 이 책을 읽었을까. 나는 ‘조용한 강대국’에 관한 그의 꿈을 우선 이해할 수 있었다. 시장결정주의와 성장제일주의가 장기간에 걸쳐 재생산해온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온통 시끄러운 나라를 넘어서려는 그의 고민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꿈과 고민의 흔적을 나는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는 잘못된 양자택일의 길을 좇아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현 정부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통일정책 없는 ‘통일정책’
이러한 꿈과 고민의 부재는 대북정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6·15와 10·24로 압축 표현될 수 있는 지난 10년의 대북정책 또는 통일정책을 애초부터 백안시하거나, 아니면 “기다리는 것도 정책이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라는 식으로 민족 문제를 아예 의도적으로, 또 허세를 떨며 방기한 심각한 결과를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물론 어떤 정권이라도 지난 정권의 정책과는 차별화를 시도하지만 이 경우는 현재 너무나도 심각한 후과를 낳고 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독일 통일의 지난 과정을 반추해볼 때도 이 문제에 대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사민당 브란트의 이른바 ‘동방정책’은 보수적인 기민당에서도 기조가 유지되었으며, 이보다 더 보수적인, 바이에른주의 만년 집권당인 기사련 당수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동·서독 관계의 개선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정권의 불연속성에서도 통일정책의 연속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통일부의 폐지안으로 시작한 현 정부의 통일정책이 결국에는 ‘비핵·개방 3000’으로 표현되었지만 이는 상대방의 존재를 아예 무시한 일방적 선언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머리 숙이고 들어오면 도와주겠다’는 식의 자만과 허세가 깔린 선언에 자존심 하나로 그동안 버텨온 북이 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는 너무나도 북을 모르고 통일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와 태도에 변화 없이는- 분명 불행한 일이지만- 남북관계의 정상화는 당분간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바마에 거는 기대와 실망
남북관계의 이런 답답한 상황을 혁파하는 중요한 계기로 많은 사람들은 사실 오바마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의 이상주의가 한반도의 현안 해결에도 신선한 변화와 충격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동안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던 6자회담의 틀 속에서 한반도 군사적 긴장의 핵심 문제인 북-미 관계 개선도 실종되는 것을 경험했던 북한은 오바마 정부의 출범에 나름대로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의 국제분쟁 해결의 선차 순위에서 뒤로 밀린 북-미 관계 개선 문제는 북으로 하여금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더 기다려보는가, 아니면 오히려 문제를 직접적으로 먼저 강하게 제기하는가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북의 지도부는 심각한 후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후자(인공위성(미사일) 발사, 핵실험)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한 결정에 대해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틀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내린 북의 섣부른 오판이고 자충수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오바마가 많은 적대국을 끌어안고 있는데 북한만 눈에 날 일을 골라서 저지른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의 이란 사태에 대한 오바마의 대응 양식에서 이러한 비판이 설득력을 잃었다고 본다. 현재 지도부와의 대화를 기본 틀로 설정했던 오바마의 대이란 정책도 처음에는 신중한 듯 보였지만 이내 현 체제 비판 세력에 대한 지지로 선회해 이란 지도부와 또다시 충돌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 기본이 하루아침에 변할 수 없고, 또 미국의 지도부도 스스로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결단 없이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오바마가 연일 ‘북한 때리기’에 앞장서고 있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대북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그러한 결단을 쉽게 내릴 것으로 나는 보지 않는다.
희망은 어디에
안팎으로 모든 문제가 착종돼 있어 분명 답답하고 실망스러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는 움직임을 먼 곳에서 찾을 수는 없다. 주변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 문제에 그들의 이해관계는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사활을 직접적으로 걸 문제는 아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남북에 사는 우리 겨레다. 스스로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도 주변국의 행보에 너무 신경쓰고, 이에만 매달리고 있다. 핵전쟁이 아니라 재래식 전쟁만으로도 민족이 공멸하는데 그동안 남북의 화해와 공생, 그리고 평화와 통일에 함께한 중요한 약속마저도 쉽게 잊혀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펼쳐진 촛불시위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추모 행렬은 정치적 상상력을 새롭게 지피는, 일종의 ‘예시(例示)적 교육’이었다. 즉, 사회 문제의 구조적 핵심을 구체적으로 들어내주는 본보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치교육이자 훈련이었다. 물론 ‘거리의 민주주의’가 선거를 대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의정치도 완전무결하지는 않은 제도이기 때문에 ‘대표자 소환권’이나 ‘시민 불복종’을 인정하지 않는가.
현 정권의 퇴진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고 들린다. 그러나 지난 대선과 총선의 결과를 앞으로도 시정할 기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며,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도 미래를 위해 훌륭한 반면교사로 잘 활용될 수 있다. ‘예시적 교육’을 통해서 더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과거에 실질적 민주주의 확립과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스스로가 적극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철저한 자기반성이 없이는 지난 선거가 낳은 여러 심각한 후과는 앞으로도 수정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글·송두율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철학박사로 독일 뮌스턴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60년대 독일 유학 중 유신 체제 개헌 반대 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남북한 사회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2003년 한국에 귀국했으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된 뒤 집행유예로 풀려나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저서로는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2007년), 경계인의 사색>(200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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